모든 운동은 극단으로 치닫기 마련이다. 오늘 우리는 이 극단의 지점에 서 있다. 낭만주의에서 모더니즘에 이르는 열광적인 자기실현은 철학적 포스트모더니즘(정치, 사회학적 표현으로는 종종 포스트 구조주의로 불린다.)을 불러왔다. 포스트모더니즘과 계몽주의는 완벽한 상극이다. 왜냐하면 계몽사상가들은 우리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믿지만 급진적인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우리가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철학적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무정부 상태의 해적 깃발 아래에서 우왕좌왕하는 반역자 선원들로서 과학과 철학의 전통적 토대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들은 실재가 마음에 의해 구성된 상태이지 마음으로 지각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구성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에서는 '진짜' 실재는 없다. 즉 정신 작용의 바깥에 존재하는 객관적 진리가 없다는 것인데, 놀랍게도 이것은 사회적 지배 집단이 유초하는 견해이다. 이렇게 되면 윤리학도 확실한 토대를 얻을 수 없게 된다. 각 사회가 동등한 이해관계에 따라 자기 나름의 관례를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제가 옳다면 각각 독특한 방식으로 표현되는 진리와 도덕이 모든 문화에서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즉 정치적 다문화주의가 정당화되고 각 민족 집단과 그 공동체 안에서의 성적 기호가 동등한 타당성을 갖는다. 이것은 관용(tolerance)의 차원을 넘어선다. 특정한 진리, 도덕, 성적 기호는 공공의 지지를 받는 것이자 다음 세대에게 가르쳐져야 할 것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앞 문단에서 언급된 구성주의 전제들이 참이라면 이런 결론도 참일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지지자들은 그 전제들을 참이라고 믿는다. 아니, 참이여야 된다는 식이다. 그들에게는 다른 것을 주장하는 것이 편협한 행위이며 곧 중대한 범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보편 진리 금지령을 무시하고 모든 이들이 받아들이는 공동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지금 중대한 범죄를 저지르고 있는 셈이다. 웬 루소의 부활인가!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학 비평 기법의 해체주의에서 명확히 표현된다. 작가들이 의미하는 바는 각자 고유한 것이고 그 기저에서는 모종의 전제들이 있다. 따라서 작가의 진정한 의도뿐만 아니라 객관적 실재와 연관된 그 무엇도 신빙성을 획득할 수 없다. 작가의 텍스트는 비평가의 머릿속에 있는 유아론(唯我論)적 세계에서 유래된 신선한 분석과 논평에 열려 있다. 그러나 비평가 또한 해체주의의 적용을 받고 비평가의 비평가 역시 마찬가지이므로 결국 무한 소급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해체주의의 창시자인 자크 데리다가 "텍스트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다. (Il n'ya pas de hors-texte.)"라고 말했을 때 의도한 바이다. 이것이 적어도 그와 그의 옹호자와 비판자의 글들을 주의 깊게 읽어 본 후에 내가 내린 결론이다. 만일 급진적 포스트모더니즘의 전제가 옳다면 내가 파악한 그의 결론이 정말로 그가 의도한 결론인지는 결코 확신할 수 없다. 역으로, 만일 내가 파악한 것이 그가 의도한 것과 동일하다면 그의 논증을 더 깊이 고려해야 할지는 불분명하다. 내가 "데리다 역설"이라고 부르고자 하는 이 퍼즐은 크레타 인의 역설(어떤 크레타 인이 "모든 크레타 인은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다. 이 문제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기는 하지만 긴급한 것은 아니다.

데리다의 현란한 몽매주의적(obscurantism, 몽매주의는 문학과 예술 분야에서 고의로 의미를 애매하게 하는 표현주의 사조를 일컫는다.) 진술들을 볼 때 그가 과연 자신이 의도한 바를 정확히 알고 있는지는 그리 분명치 않다. 어떤 이들은 그의 글이 의도적으로 일종의 농담, 즉 실없는 말을 써 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새로운 "과학"인 그라마톨로지(grammatology)는 실은 과학과 정반대의 것으로서 진부함과 환상을 동시에 가진 비일관적 꿈들의 단편이다. 그것은 문명세계의 다른 곳에서 발전한 마음과 언어의 과학에 대해 마치 췌장의 위치도 모르는 심령치료사처럼 무지하다. 그는 이런 일종의 태만함에 대해 의식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는 루소의 『에밀』에 나온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하면서, 책과 글쓰기의 적이라고 자신을 규정했던 루소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철학은 우리에게 주어진 악몽이다. 당신은 나 역시 몽상가라고 할지 모르겠다. 그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나는 다른 이들이 하지 못한 것을 한다. 나는 내 꿈이 꿈이라 말하며, 깨어 있는 사람들에게 유용하다고 판명될지 모르는 것들이 그 꿈속에 있는지를 독자들이 찾아내도록 남겨 둔다."

깨어 있기에, 깨어있는 동안 자신이 한 말에 책임을 져야 하는 과학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유익한 점을 발견하지 못했다. 과학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태도는 일종의 파괴였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중력, 주기율표, 천체물리학을 포함해 외부 세계를 지탱하는 수많은 기둥들을 잠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듯 하다. 더욱이 그들은 과학 문화가 앎의 방식들 중 하나일 뿐이며 특히 구미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쯤으로 여긴다.

이런 의미에서 혹자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신지학(theosophy, 신비주의에 관심을 기울이는 종교 철학, 직접적 체험을 통해 신을 알 수 있다는 일종의 신비주의이다.), 초월론적 관념론과 함께 역사의 골동품 창고로 내려 보내고 싶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미 사회과학과 인문학의 주류로 스며들었다. 이것은 일종의 메타 이론(이론에 관한 이론)이다. 학자들은 이 기법을 사용해 과학 분야의 주제들을 분석하기보다는 특정 과학자들이 왜 그런 식으로 사고하게 되었는지를 문화 · 심리학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분석자는 과학자들이 이론과 실험을 설계하는 과정에서 특정한 지배 이미지, 이른바 "근원 은유(root metaphors)"를 사용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인간을 기계로 보는 관점이 어떻게 현대 심리학을 지배했는지에 관해 케네스 저건(Kemmeth Gergen)의 설명을 들어 보자.


개인 행위의 특성과는 상관없이 기계론자는 개인을 환경에서 분리한 후 환경을 자극과 입력 요소로 보고 개인을 입력 요소들에 반응하고 의지하는 존재로 간주한다. 또한 정신 영역이 (상호 작용하는 요소들로) 구성된다고 보기 때문에 개인의 행위를 자극 입력에 통합될 수 있는 단위들로 분할하는 작업을 할 수밖에 없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심리학이 자연과학이 될 처지에 놓여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원하지 않은 이들을 위한 방책으로 저건은 정신에 대한 덜 치명적인 근원 은유들도 제시했다. 시장, 극작법, 규칙따르기 등이 그 예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만일 심리학이 생물학으로 짙게 채색되지 않는다면 앞으로 심리학 분야에서 이론가들은 끊임없이 양산될 것이다.

다양한 은유들이 민족적 다양성과 성(性, gender) 이원론에 적용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학계는 새로운 작업 공간을 만들어 냈다. 또한 그 비유들이 정치화되면서 학파와 이념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포스트모더니즘 학계는 새로운 작업 공간을 만들어 냈다. 또한 그 비유들이 정치호되면서 학파와 이념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대개 좌파 지향적인데 아프리카 중심주의, 구성주의 사회인류학, '비판적' 과학(사회주의), 근본주의 생태학, 에코페미니즘, 라캉의 정신 분석, 라투르(Brwno Latour)의 과학사회학, 신마르크스주의 등이 포함된다. 여기에 해체주의 기법과 뉴에이지 전일론과 같은 혼란스러운 변이들이 그 주위를 맴돌거나 다리를 걸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지지자들은 난해한 전문어들을 남발하여 진영을 어지럽힌다. 물론 가끔씩은 멋진 용어들도 있기는 하다. 각자의 방식들은 17세기에 계몽사상이 폐기한 "두려운 신비(mysterium tremendum)"를 향해 표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상당한 개인적 고뇌를 드러내면서 말이다. "서양 사상의 정점"에서 정치가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를 훌륭하게 해석해 낸 후기 미셸 푸코에 대해 조지 사이앨러버(George Scialabba)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푸코는 심원하며 가장 다루기 힘든 현대인의 정체성 딜레마와 맞붙어 싸웠다. …… 신도 자연법칙도 초월적 이성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으며, 권력이 다양하고 미묘한 방식으로 기존의 모든 도덕을 타락시키고 심지어는 합법화해 왔다는 것까지 알아낸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으며 어떤 가치에 의존할 수 있을 것인가?


정말로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야 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런 불온한 문제들을 풀어내기 위해 우선 푸코와 실존주의적 절망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보자. 그리고 다음과 같은 대략적인 지침을 생각해 보자. 만일 어떤 철학적 입장이 혼란을 야기하는 동시에 후속 탐구들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면 그것은 틀린 것일 가능성이 높다.

푸코의 경우에는 그리 나쁘지 않다고 말하고 싶다. (선심을 쓰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우주가 단지 우리 마음속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충격적 사실(?)을 발견하고 그 충격을 극복하고 나면, 지질학적 시간에 걸쳐 인간 종을 탄생시켰으며 심오한 역사의 잔류물로 남겨둔 유전 규칙을 해독하는 일이 왜 중요한지를 알게 된다. 왜냐하면 유전 규칙을 해독함으로써 인간 두뇌가 터득할 수 있는 모든 의미와 품을 수 있는 모든 감정 그리고 즐기고 싶은 모든 모험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성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할 것이고 감정은 무제한적으로 기능할 것이다. 거짓과 감이 가려질 것이며 우리는 서로를 더욱 빠르고 정확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같은 종의 일원이며 생물학적으로 유사한 두뇌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가 점차 소멸하고 사회적으로 의미 없어짐을 우려하는 사람들에게 나는 두 종류의 독창적 사상가들이 늘 존재했음을 이야기하려 한다. 그들은 무질서를 보고 질서를 창조하려는 부류와 질서에 맞닥뜨려 무질서를 만듦으로써 이에 대항하려 했던 부류이다. 그 둘 사이의 긴장이 지식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그 긴장이 지그재그형 진보를 통해 우리를 들어 올린다. 그리고 여러 사상들이 다윈주의적으로 서로 경쟁할 때 승자는 늘 질서의 편에 서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실제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몇가지 이유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그들은 열광적 낭만주의의 현대적인 집전자集電子로서 문화를 비옥하게 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말한다. 어쩌면 당신들이 틀렸을 거라고. 그들의 생각은 마치 계속 타오를 에너지도 없이 모든 방향으로 뻗어나가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리는 불꽃놀이의 불꽃과도 같다. 하지만 몇몇은 수명이 충분히 길어 예기치 못한 주제에 빛을 던져 줄 것이다. 이 점이 포스트모더니즘이 합리적 사고를 위협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좋게 생각할 만한 한 가지 이유이다. 또 한 가지 이유는 거추장스러운 과학 교육을 받지 않기로 선택한 자들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이 위안이 된다는 것이다. 철학과 문학 진영에 작은 산업이 형성된 것도 긍정적 요소일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전통 학문에 대해 굴복할 줄 모르며 끊임없이 비판한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포스트모더니스트와 같은 반란자들이 항상 필요하다. 적대 세력의 공격을 끊임없이 방어하는 것보다 지식을 강화하는 더 나은 방법은 없다. 존 스튜어트 밀은 적이 없으면 교사와 학생이 모두 그 자리에서 잠들어 버린다고 말한 바 있다. 만일 모든 근거와 이유가 땅에 떨어져 바퀴의 고정 핀이 떨어져 나가고 모든 거시 인식론적 혼돈으로 빠져든다면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스트가 옳았다고 인정할 용기를 찾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수학자 다비트 힐베르트(David Hilbert)가 계몽사상으로 표출된 인간 정신의 일부를 잘 포착해 말했듯이,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하고, 우리는 알게 될 것(Wir msussen wissen. Wir werden wissen)"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알아야 하며 알게 될 것이다.








중간에 포스트모더니즘 흐름은 치기 싫었지만 연결돼야 이해되는 부분이라 다 쳤음...

정말 마음에 들었던 단락은 푸코 다음부터이다.


저자는 계몽주의의 손을 들어주는 것 같아 살짝 거슬리지만(ㅋㅋㅋ)

내가 생각하기에도 포스트모더니즘은 (책의 주장에 따르면) 비효율적인 곁가지 빌런처럼 보임에도 모든 것에 회의를 주장하는 건 대단한 에너지같다.



한창 이런 생각에 빠져있었는데, 역시 먼저 생각한 인간들이 있었군ㅋㅋㅋ

파괴 끝에 창조가 있고 무질서가 질서로 이어질거라는, 순환될 거라는 생각이 좋았다.


모든게 상징이고 정신활동의 부산물이라면 살아있는 모든 것은 홀로그램에 지나지 않는가? 하고 답답해진다. 그럴 때면 절대적인 영역을 찾게 된다. 수학과 과학 특히 생물학과 천체물리학을 보게 되는데 이 분야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마찰을 빚는다는 부분도 재밌었다.

절대적이라면 개인의 사상이 가장 절대적이라고 생각이 들긴 해 답답함은 완전히 가시지 않지만ㅎ


포스트 모더니스트 작가나 철학자들을 찾아봤는데 좋아하는 인물이 많이 포함 돼, 좀 놀람




통섭은 오래 전 사뒀다가 어디에 처박아두고

도서관에서 표지가 너덜너덜한 책을 빌리는군ㅋㅋㅋ


도서관은 가면 뭘 안 해도 차분해지고 고양되는데

욕심에 이것저것 빌려오면 방에선 아무것도 못한다.

둘러볼땐 아무데나 펴서 꽤 읽는데

빌려오면 두께만큼 부담감이 곱해져 표지도 못 펴다본다.

매일 가고 싶지만 일단 나가기까지가 엄청 귀찮음

by 하완 오늘의 문구 2018. 11. 16.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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